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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의병 무시한 선조도 인정한 영천 전투

글쓴이 : 정만진 날짜 : 2017-06-19 (월) 14:37 조회 : 20
글주소 : http://www.nolakorea.com/b/rssnews-10427





1592년 4월 21일 경주가 왜적의 손에 넘어갔다. 부산에서 올라온 가등청정의 대군은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천년 고도' 경주를 점령했다. 경주 함몰 소식을 들은 장기의 이대임과 서방경, 영일의 심희청은 4월 25일 약간의 군사들과 함께 알천을 건넜다.





알천은 보문호에서 흘러내려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시내이다. 즉 '알천을 건넜다'라는 표현은 포항에서 경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뒤를 이어 기계의 김광복도 경주로 달려갔다. 그는 형산강을 따라 남하했다.




천년 고도 경주가 왜적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보다 이틀 전인 4월 23일에는 김현룡이 군사를 일으켰다. 아들 진성, 친동생 김원룡, 사촌동생 김우호, 김우정, 김우결이 먼저 의기투합했고, 다음날인 24일 정씨 삼 형제인 정대영, 정대용, 정대유와 권여정, 김천목, 안신명 등 10여 명이 동참했다. 경주에 갔던 심희청도 돌아와 힘을 보탰다. 25일 의병군 참가자들은 김현룡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포항 의병군은 4월 30일 첫 전투를 치렀다. 이때 의병군의 병사는 약 500명에 이르렀는데 안강에 머물고 있던 적과 싸워 이겼다.




포항 인근 흥해에서도 의병이 일어나고




5월 17일에는 흥해에서도 정인헌, 정삼외, 정삼계, 이열, 최준민, 이대립, 안성절 등 10여 의사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물과 재산을 털어 병기를 갖추고 모병을 하였다. 이어 군율을 정하고 진을 정비하여 출전 준비를 마쳤다.




권여정, 김우결, 김원룡, 김천목, 김현룡, 박몽서, 서극인, 서방경, 심희청, 안신명, 이대립, 이대인, 이대임, 이화, 정대용, 정삼외, 정인헌, 진봉호, 최흥국, 호민수 등 포항 일원의 의병장과 의사들은 6월 9일 문천(경주 남천) 회맹에 참가했다. 경주판관 박의장이 이끌고 온 관군까지 동참하자 문천 회맹에 출전한 아군 병력은 무려 4,200명이나 되었다.







6월 17일 왜적이 언양에서 경주로 북상하는 것을 남천과 금오산(경주 남산)에 매복한 채 기다리고 있다가 양옆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왜적은 4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채 청도 운문산 방향으로 도주했다. 





그후 포항 의병군은 (김현룡이 남긴 글 등을 모은 『수월재 선생 일고』에 따르면) 7월 23일 영천으로 갔다. 영천성 수복을 결의한 정세아, 정대임 등 영천 의병장들의 지원 요청에 따른 군대 이동이었다. 영천성 수복 전투에는 신녕의 권응수 의병군 등 4,000여 명의 의병과 관군이 참전했다. 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7월 27일 왜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성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선조도 인정한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




선조는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명나라 덕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것이 없다.'라고 단언했다(『선조실록』 1601년 3월 17일자). 이 발언은 선조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모든 공로를 명군에게 돌림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합천 창의사 『합천 임란사 2집』).'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선조가 1603년 2월 12일에는 '우리나라 장수와 병사들이 왜적을 막는 것은 양을 몰아 호랑이와 싸우는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으뜸가는 공이고, 그 이외에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뜻에 찰 뿐 나머지는 듣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의 덕일 뿐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한 게 없다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지만, 영천성 수복 전투의 승리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만큼 영천성 수복은 경주성을 탈환하고 경상도 중부권의 왜적을 울산 쪽으로 밀어내는 데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역사상 중요한 승전이었던 것이다.




영천성 수복 전투에 참전하여 한몫을 한 김현룡, 김우호, 김우정 김우결 등 포항 의병군은 8월 20일 경주로 진격했다. 영천성 수복에 성공한 직후여서 경상좌병사 박진, 경상좌방어사 권응수는 말할 것도 없고 의병들도 한껏 기세가 올라 있었다.




기세만 믿고 전투 준비는 소홀히 한 채 적을 공격했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권응수는 전투 중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경주판관 박의장도 적에게 피습을 당해 어깨를 다쳤다.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아들 의번은 포위된 아버지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 전사했다. 김현룡의 사촌동생 김우호와 포항 의병 이봉수도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했다.




준비 없이 벌인 1차 경주성 전투, 패전으로 끝나고


 




9월 7일 2차 경주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는 경주부 소속 화포장(대포 제작 기술자)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일종의 시한폭탄인 비격진전뢰는 경주성 탈환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왜적은 9월 8일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경주성 수복에 기여한 포항 일원 의병군은 형산강으로 돌아와 진을 정비했다. 군사들이 반 이상이나 전사한 상태였다. 경주 지역 의사 22인과 청하 의사 김문룡, 김득경, 이인단, 김성운, 흥해 의사 이재화 등이 찾아와 격려했고, 이들을 비롯해 인근 지역의 의사들이 병사를 많이 보충해주었다.




의병 절반이 전사하자 모병 활동에 나선 지역 의사들




1593년 2월 21일에는 문경과 상주의 접경 지역인 당교 전투에 지원군으로 참전하여 10여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또 1594년 1월 25일에는 권응복, 박몽서, 이대립, 이열, 이영춘, 이질, 이화, 정삼고, 정삼외, 진봉호, 최준민, 최흥국 등이 울산왜성의 적을 격퇴하는 데 일조하였고, 6월 5일에는 형산강에서 왜군과 접전을 벌여 무찔렀다.『포항 시사』에는 '적은 퇴로가 막혀 강물에 빠져 죽거나, 혹은 사살되어 전멸되니 시신이 강을 메우고 강물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포항 의병군은 그 뒤로도 많은 활동을 펼쳤다. 1596년 3월 3일, 9월 28일, 1597년 3월 22일 팔공산 회맹에 참가하여 정유재란에 대비했던 포항 일원 의병장들은 1597년 7월 21일의 화왕산 회맹에도 동참했다. 일본군은 화왕산성 함락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그냥 물러갔다.








의병군은 1597년 12월의 울산 전투에도 참전했다. 1597년 12월 23일 조명연합군이 왜군의 본거지 도산성(울산왜성, 현 학성공원)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울산 전투는 처절했다. 당시 조명연합군은 울산에서 이기면 침략군을 바다 너머로 내쫓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조선군 도원수(총사령관)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 1만여 명과 경리조선군무(조선 파병 명군 2인자) 양호가 이끄는 명군 4만여 명은 울산왜성을 포위했다. 울산왜성에는 가등청정의 1만여 장졸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군대 규모로는 조명 연합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13일에 걸쳐 전투가 계속된 1598년 1월 4일, 울산왜성의 1만여 일본군은 대부분이 죽고 500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때 부산, 양산, 안골(진해), 가덕(부산 가덕도)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장수 11명이 6만여 대군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미 조명연합군도 1만 5,000명이나 전사한 상태였다.









사촌동생 3명을 모두 잃은 의병장



『포항 시사』에는 '역전의 영일 의병장 김우정, 김우결이 전사하자 초혼하여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현룡은 함께 창의했던 세 명의 사촌동생을 왜적과 싸우는 중에 모두 잃는 아픔을 겪었다. 김우호를 1차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잃고, 김우정과 김우결을 1차 도산성 전투에서 잃었던 것이다. 


 


조명연합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나 우리 군사도 얼어 죽은 사람이 서른이나 되었다. 이때 사촌동생 우정도 전사했다.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경주싸움에서 우호가 죽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수월재 선생 일고』 중 「난중일기」).'





시신도 찾지 못한 채 잃어버린 사촌동생




김현룡은 1598년 2월 15일 의병을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이미 재가 되어 있었고 산비탈에 지은 움막만 겨우 남아 있었다. 처자식은 살아 있었으나 대대로 내려오던 문서와 서책들은 불에 타서 없어졌다.


 



 

전쟁이 끝난 후 나라에서 절충장군(정3품)의 품계(계급)와 두모포 만호(종4품) 직책을 내리지만 김현룡은 벼슬을 사양한 채 여생을 줄곧 평온하게 살았다. 그는 책을 읽고 시를 썼다.



그가 남긴 많은 시 중에서도 특히 「대암산 바위 위의 소나무를 보며」는 의병장 김현룡, 선비 김현룡의 삶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그의 시를 읽어본다.




不肯同腐土 썩은 흙과 함께 지낼 수는 없어


鑽巖托根深 바위를 뚫고 깊숙이 뿌리를 내렸네


直立不霄幹 줄기는 곧게 솟아 하늘을 찌르누나


斧斤敢相侵 도끼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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